스티브 딕슨의 <디지털 퍼포먼스> 역서가 출판되었습니다. film/media

새 역서가 나와서 알려 드립니다. 제목은 <디지털 퍼포먼스>이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디지털 아트의 전개 양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풍부한 자료를 수록한 덕에(탓에?) 880쪽이나 됩니다. 디지털 미디어아트의 역사, 이론, 실천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담고 있어서,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을 불문하고 유관 전공 연구자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번역을 진행하느라 꽤 오래 걸렸습니다.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던 만큼 (그럼에도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완성도 있게 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 예술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신 많은 분들께, 특히 이 분야의 연구자들께 크고 작은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불, 시간, 생명의 그림 Art criticism

2022 올해의 청년작가전 (2022. 9.29-11.5 대구문예회관) 박준식(노비스르프) <테오>전에 부쳐 쓴 글입니다. 



불, 시간, 생명의 그림


 강미정 (미학)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작은 캔버스를 태우는 토치가 보인다. 토치의 불길이 캔버스를 태운다는 말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불꽃이 닿는 곳마다 흰색 붓질이 윤곽을 드러내며 하나의 평면 작품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태우는 행위는 통상 소멸이나 파괴를 초래하건만, 박준식의 캔버스에서는 외려 새로운 무언가가 생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온의 화력이 일으키는 연소 작용은 그의 ‘그리기’(painting)에서 가장 중심적인 매체로 기능한다. 그림의 배경 작업을 하면서 전체 화면의 요철을 만들어 낼 때도, 배경 위에 그린 그림의 색을 되살릴 때도 불의 힘이 동원된다. 화면에 어떤 형상을 그리기 이전에 박준식은 동양화 과슈와 아크릴 바니쉬를 적정 비율로 섞어 만든 안료를 여러 번 덧칠하여 배경을 만든다. 많게는 일곱 번까지 겹쳐 칠해 만든 배경 화면에 불꽃이 닿게 되면 수성물감은 추상적인 문양을 남기며 건조된다. 완성된 바탕 위에 작가가 흰색 안료로 무언가 형상을 그린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흰색이었던 형상은 투명하게 변하여 애초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러다 토치의 불길이 스쳐 지나면, 사라져버린 형상을 이루던 선들이 신기하게도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더러는 잿빛으로, 더러는 흰색으로 말이다.    

박준식은 자신의 작업이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 개념을 비트는 일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게 된 형상이 불과 접촉해 다시 가시적이 되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이고 비선형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불그림’(fire painting)은 존재했던 어떤 것, 이제는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상식적인 시간관을 위반한다. 다시 그곳, 그때,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가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 토치의 불꽃은 대형 캔버스 위에 해바라기, 붓꽃, 목련, 그리고 반 고흐의 자화상을 되살려 놓는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존재가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불의 개입은 결정적이다. 빛과 열의 방사가 없다면 원상복귀도 없다. 화염이 캔버스를 가로지를 때 비로소 시간은 가역적으로 흐르고 이제는 죽고 없어진 꽃도 사람도 눈앞에 현존하게 된다. ‘불그림’은 시간에 관한 것인 만큼이나 생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삶으로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다시 살아오실 수 없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불가능은 그림이라는 가상적 공간 안에서 가능으로 바뀐다. 

박준식은 어쩌면 불로 그리기를 통해 태곳적의 주술사가 그랬듯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식(ritual)을 치루는 것일지도 모른다. 엠페도클레스가 물, 공기, 흙과 함께 불을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4원소로 꼽았던 것은 그와 선배 자연철학자들이 불을 물리화학적 기본 요소 중 하나로 봤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불이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먹을 것을 찾아 하루 종일 달려야 했던 원시인들에게 초원의 맹수들은 두려운 포식자들이었다. 구석기시대인들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한 존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불이었다. 불은 맹수들을 쫓을 뿐만 아니라 추위로부터 보호해줬고 고기를 익혀 먹을 수 있게 했다. 화식을 하기 시작한 이후 인간의 뇌 용적이 비약적으로 커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타오르는 불빛은 인간에게 생명 그 자체였다. 원시적인 제식부터 종교적인 의식, 그리고 현대 올림픽 행사까지 불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불이 곧 생명이고 희망이고 용기이기 때문이다. 

불꽃을 피움으로써 사라진 형상을 소생하게 하는 박준식의 작업은 죽음을 초극한 생명, 고통과 질곡이 없는 삶을 염원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단지 그의 작업이 불을 매체로 사용하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실상 박준식은 어떤 종교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한편 시간의 비선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박준식에게서 모종의 종교적 갈망이 엿보였다는 것이다. 지나버린 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생각이 비선형적, 가역적 시간에 대한 사유로 이끌리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또한 대형 캔버스를 여러 겹 덧칠하여 바탕을 만들고 그려진 형상을 드러내기까지 오랜 시간 지속되는 고된 노동은 구도와 치유를 향한 행위로 읽히기도 한다. 

박준식은 ‘불그림’을 시작한지 거의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불로 그리기’는 학부 시절부터 시작한 기법인 셈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동안 씨름했던 기법이 어느덧 궤도에 올라, 작가 마티에르와 선묘가 돋보이는 스펙터클한 정물과 인물을 대중에 선보이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 캔버스에 화염을 방사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사용하는 불은 사실상 그림을 태우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그림을 생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선형적 사건으로 볼 것인가 비선형적 사건라고 볼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완성된 그림 속 형상은 원래 그림의 회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생성물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안료의 성분 변화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존재를 상실했던 사물이 소생했을 때는 더 이상 처음과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작품과 함께 진화한다. 해바라기, 붓꽃, 목련, 반 고흐가 그의 손에서 재탄생할 때 작가도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번 <테오>전에서는 반 고흐를 테마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차후에는 어떤 내용을 화면에 담아낼지 궁금하다. 불로 그리는 화가 박준식이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도 전하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색즉시공, 다름의 만남 Art criticism

오늘도 뒤늦은 포스팅합니다. 작년 2021.04.12 ~ 2021.06.30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진행했던 현대불교미술전에 관한 평문입니다. 참여 작품 수준도 높았고 전시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은 전시도록에 실려 있습니다.  
전시 내용 안내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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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미술전 <공>(空, Śūnyatā) 전시평, 강미정(미학자)


색즉시공, 다름의 만남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 솔로몬, 『전도서』(공동번역), 1장 2절


19세기 초부터 숱한 천주교 신자들이 참형당한 곳,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장소성은 단지 기독 신앙에 대한 헌신만을 상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교자들은 대부분 진정한 자유와 참된 자아를 희구한 이들이며, 그렇기에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 다르다. 구교든 신교든 간에 기독교는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누구라도 수양을 하면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두 종교 사이에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자라면 자유와 자아의 궁극성 - 구원이 됐든 성불이 됐든 간에 - 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진정하게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참된 ‘나’로 산다는 것은, 혹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불교미술전 <공>(空, Śūnyatā)에 참여한 미술가들은 종교와 사상의 차이를 넘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던질 수 있는 이런 물음들에 관해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중 여럿은 비디오영상과 미디어설치 같은 새로운 매체를 취함으로써 종교 간의 장벽과 더불어 예술과 과학 사이에 놓인 경계도 허물고 있다.    

현대 인지신경과학자들 중에는 우리 마음의 작용이 몸의 행위와 별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불교철학을 도입한 이들이 있다.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에서 바렐라, 톰슨, 로쉬는 대승불교의 한 갈래인 용수(龍樹, Nagarjuna)의 중관(中觀) 철학 또는 공 사상을, ‘체화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경험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삶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에 관한 설득력 있는 실천철학이라고 파악한다.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에서 나온 인지과학과 대표적인 동양 사상 중 하나인 불교가 함께 논의된다는 것은 언뜻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대 과학과 불교, 이 두 이론체계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마음에 관한 오랜 탐구의 전통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명한다. 특히 1980년대부터 인지과학자들 사이에서 체화된 인지에 관한 연구,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몸을 떠나서는 작용할 수 없다는 논의가 확산되면서 서양 과학과 불교 사상의 만남이 왕왕 시도되었다. 

1990년대 이후 많은 인지과학자들은 데카르트적인 심신이원론 뿐만 아니라 명확하고 의심할 수 없는 자아 관념을 부정하고, 우리들 각각이 비아(非我), 즉 타인들과 외부 환경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신경생물학은 체화된 인지에 관한 주장들에 든든한 근거를 제공했다. 『몸의 인지과학』의 저자들은 인지신경과학의 성과들에 의지하는 한편, 책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용수의 중관 철학의 핵심을 제시함으로써 주체(자아)나 객체(비아)라고 할 것이 없음을, 다시 말해 “색은 곧 공”(色卽是空)임을 설명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그러한 존재들은 일견 단단하고 가득찬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떠한 고유한 속성이나 실체도 갖고 있지 않다. 자아도 대상도 그 무엇도 ‘없음’을 앎으로써 ‘있음,’ 즉 존재에 대해 이해하는 것,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다. 

초기 기독교 시기, 고대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에 정통했던 사도 바오로가 정립한 기독교 신학은 많은 점에서 서양 과학과 닮았다. 중세의 교부철학자들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합리주의적 전통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나로 살지 않고 예수의 제자로 살” 때에야 비로소 참된 나가 된다는 가르침에 있다. 나를 내려 놓음으로써, 또는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아와 자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근본적인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우리의 마음이 체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인지과학자들은 어쩌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예수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때로, 또 석가모니 시절의 초기 불교로 되돌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이 전시의 주제인 '공’ 또는 '순야타’(Śūnyatā)의 정신은 상호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에 있는 것 같다. 전시에 참여한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는 대립적인 것들의 만남이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하늘길에 설치된 김승영의 <쓸다>(2021)에서는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엿볼 수 있다. 하늘길 전면의 벽뿐만 아니라 바닥조차 스크린으로 삼은 작가의 시도 덕분에 이 공간에 들어서는 관람자들은 스님의 반복적인 마당쓸기 행위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비질을 하는 스님의 몸은 분명 움직이고 있지만, 그 반복적인 패턴으로 인해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은 다소 정적이다. 이때 스크린을 마주한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사운드가 크게 한몫 한다. “싸악, 싸악” 하는 비질 소리는 시각적 효과를 더 강화하여, <쓸다>를 입체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공감각적 효과를 자아낸다. 김승영은 “스님의 몸의 움직임을 통해 빗자루 끝에 전해지는 스님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고 말하나, 평자가 느끼기에 작가 자신이 체험한,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체화된 인지의 경험을 전하려는 것 같다. 

지하3층 계단 아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 “너는 나다“, “나는 너다” 라는 글귀를번갈아 띄우는 전광판이 놓여 있고 옆에는 라면과 배낭 같은 일상용품들이 놓여 있다. 윤동천의 <너는 나다>(2021)이다. 전시장 바닥에 가변적으로 설치된 오브제들은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최후를 맞이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방에서 나온 물품들과 동일한 것들로 구성된 레디메이드다. 안전사각지대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는 요즘이다.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한 김용균이 잘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 중 하나가 곧 나일 수 있음을, 다시 말해 타자가 곧 자아임을 우리는 종종 간과하거나 일시적으로 자각하더라도 금새 잊어 버리곤 한다. 이용백은 윤동천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아의 죽음 또는 없음(空)을 보여준다. 이 전시에 출품한 <자기혐오>(2014)는 그의 <피에타> 연작 중 하나다. 이용백의 <피에타>는 죽은 아이를 안고 애통해 하는 모자상이 아니다. 사이보그를 연상시키는 그의 조각상들은 거푸집과 그것으로 만든 형상이다. 자기 안에서 나온 형상의 죽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조각상이, <자기혐오>에서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형상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거푸집 모양의 조각이 원래의 자아(ego)라면 그것을 폭행하는 형상은 자아 안의 또 다른 자아, 즉 타아(alter-ego)라고 하겠다.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 나는 하나인가, 둘인가, 혹은 여럿인가? 나라는 것은 있기는 한가? 답변은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김기라는 박물관의 심장부라 할 콘솔레이션홀의 대형 스크린을 거대한 영상작업으로 채웠다. <장님ᅳ서로 다른 길>(2018)>에서 맹인의 은유는 한 국가 사회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그룹들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는 빈부격차, 노사갈등,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영호남 갈등으로 대표되는 지역 갈등이 고질적인 병폐였는데 최근에는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도 두드러지는 것 같다.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닌 소집단들 중 하나가 국가권력을 좌우하는 지위에 올랐을 경우 그 집단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은 차별과 억압의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장님>은 상대방의 시선이나 목소리에 아랑곳없이 자기 주장만 늘어놓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는 맹목적 시도가 결국 무분별한 폭력을 초래하는 사태를 유비하는 것 같다. 이 작품과 함께 상영된 <세기의 빛ᅳ정토 16-01>(2016)는 반대로 정적이고 명상적으로 두 사찰(대흥사와 미황사)의 대웅전 풍경을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김기라는 이질적인 두 작품을 한 공간에서 상영함으로써 ‘색’을 유비하는 <장님>과 ‘공’을 상징하는 <정토>가 세인들의 현실 경험에 공존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하늘광장에 설치된 강용면의 <온고지신ᅳ울림>(2021)에서도 대립적인 것들의 만남이 엿보인다. 작품 제목인 ‘온고지신’은 오랫동안 옛것과 새것의 조화에 천착해온 작가의 고심을 응축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채색목조각으로 주목받아온 강용면에게 옛것 또는 우리의 것과 새것 또는 서구의 것 간의 단절, 간극, 이접은 줄곧 화두가 되어왔다. 전작들과 다르게 나무가 아닌 철골과 에폭시를 사용한 <울림>은 한층 더 현대화된 전통의 반향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그 수직적 구조와 하늘광장이라는 장소성으로 인해 하늘의 뜻(아마도 ‘공’)과 땅의 삶(아마도 ‘색’)을 잇고 있는 듯하다. 붉은 벽돌과 대비되는 푸른색이 선명한 수직 구조는 물기둥 같기도 하고, 형태만 놓고 보면 불꽃 같기도 하다. <울림>은 높이가 4.5m나 되는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하늘광장의 넓이 때문에 세속인의 염원처럼 소박하게 보인다. 그것은 여기서 순교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한편 반목, 갈등, 폭력 대신 화해, 관용,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들을 대변하는, 하늘과 땅의 만남으로 읽힌다. 하늘광장에는 또한 그간 사진작업을 주로 해온 천경우의 설치작업 <가사 없는 노래>(2021)도 전시되었다. 시립농아인복지관과의 협력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관객이 소리그림에 따라 종을 울려 소리를 내게 하는 참여형 설치다. 청각장애는 많은 경우 언어장애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가사 없는 노래>의 제작에 참여한 농아들 중에는 소리를 듣지 못할뿐더러 발화를 하지 못하는 이들도 포함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악보(소리그림)를 만든, 또는 작곡을 한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농인들이 만든 소리그림이 다른 이들에 의해 평화의 종소리로 울려 퍼질 때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얻는다면, 이는 아마도 무음의 소리라는 역설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소리의 있음과 없음의 공존은 노상균의 <New Ends>(2008)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관객이 처음 마주하게 되는 이 작품은 “새로운 마지막”이라는 제목만큼이나 역설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노상균은 가볍다 못해 키치적인 시퀸을 재료로 삼아 공 사상에 유비해도 좋을 만한 중량감 있는 표면을 창출해낸다. 여기서 무음의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3차원의 착시를 일으키는 시퀸 작품의 표면이 마치 스피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노상균의 검은 화면은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한하게 반복될 것 같은 시퀸들의 원환운동은 보는이에게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원래의 값싸고 흔한 재료를 깡그리 잊게 만드는 어떤 경외의 감정을 유발한다. <New Ends>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재료와 구성으로 ‘존재의 있음과 동시에 없음’(空)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 원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적 현상에는 불변하는 속성도 영원한 실체도 없다. 그렇게 비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현상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 철학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공 사상과 공명하는 말을 어언 3000 여년 경 한 지혜의 왕이 했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석가모니와는 달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이 언명은 단순히 허무주의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가 전하려 한 메시지는, 세인들이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욕망하고 얻고자 쟁투하지만 사실상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음을 고백하고 신 앞에 겸허히 무릎 꿇을 때 그 무언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에서 전하는 인생의 이치는 우리가 ‘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불교미술전 <공>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고 또 예술과 과학도 만난다. 전시의 여러 작품들은 각각 나름대로 서로 다른 것들의 만남을 변주한다. 참여 작가들은 몸과 마음이, 나와 너가, 자아와 타자가, 개인과 집단이, 옛것과 새것이, 음과 무음이, 가벼움과 무거움이 다르지 않음을 다채롭게 펼쳐낸다. 그들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 같이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에 정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김기라의 <장님>에서 맹목적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이나 노상균의 <New Ends>를 구성하는 시퀸들이 거기에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그 존재가 텅 빔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공 또는 존재의 헛됨이라는 테제가 다양하게 풀이된다. 대승불교의 공 개념은 어찌 보면 인간사의 어떤 이야기라도 다 담을 법한 포괄적인 주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 성지의 마당에서 형상화된 불교 철학의 정수가 새로운 컨텍스트를 창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공>전에 방문한 많은 관객들이 이 전시를 그저 이색적인 경험으로 기억하는 대신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울림으로 간직하기를 기원한다.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머니즘 Neuroaesthetics

뒤늦은 포스트 하나 올립니다. 작년 말에 출판된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머니즘>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미디어아트 기획자 김경미선생님과 "AI아트: 인간과 기계의 공생"을 썼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명하게 동시대 기술문화 현상을 잘 요약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책 소개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한국 미디어아트의 흐름 Art criticism

오랫동안 준비한 공저를 지난 달에 출판했습니다. 국내 미디어아티스트 37팀의 인터뷰를 수록하고 미디어, 미디어아트, 그리고 한국 미디어아트의 간략한 역사를 다룹니다. 미디어아트 작업을 하는 작가와 작가지망생,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사를 공부하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기초적 자료가 되길 기대합니다. 

한국 미디어아트의 흐름
강미정 장현경 지음, 북코리아, 2020


오늘날 우리에게 미디어아트는 과연 무엇인가?

백남준과 박현기 같은 선구자들의뒤를 잇는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동시대 한국미술계의 중요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미술계에도 한류바람을 타고 젊은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국외에서도 약진하고 있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 이러한 현실에 반해, 백남준과 박현기 이후 한국 미디어아트의 계보에 관한 일목요연한 저술도, 동시대한국 미디어아트의 현황과 의의에 관한 체계적인 고찰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드물게나마 관련 저술을만나기도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성숙된 내용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단행본 저작을 만나기 힘들다. 『한국 미디어아트의 흐름』은 한국 미디어아트의 시초부터 최근까지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1970~1980년대 작가부터 30대 젊은 작가에 이르는 한국의대표적 미디어아티스트 37팀을 인터뷰하여 구성한 비평서이다. 이책에서는 1960년대 백남준이 초석을 놓은 비디오아트로부터 2010년대동시대 예술가들의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국적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의 활약상을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미디어 같은 핵심어를 중심으로 일람한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시간을 거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테크놀로지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의 태도에서는 비교적 일관된 흐름이 포착된다. 한국미술계에서 지분을 넓혀온 동시대미디어아티스트들은 1960~1970년대 백남준, 김구림, 김순기가 꿈꾸었던 열린 미술, 소통의 미술, 비결정의 미술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예술은 테크놀로지를활용하는 데 머무는 대신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사유를 포착할 새로운 개념을 좇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미디어아티스트 37팀의 인터뷰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삶과 세계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대한다소 결을 달리하는 목소리들을 들려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I. 우리에게 미디어아트는 무엇이었고 또 무엇인가?
1 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
2 한국 미디어아트 반세기의 궤적

II 한국 미디어아트의 시초
1 백남준과 비디오아트
2 한국적 아방가르드 미술과 초기 미디어아트
3 작가 인터뷰
김구림 /김순기

III 한국적 포스트모던과 미디어아트
1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단상: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2 신세대 미술과 미디어아트의 부상
3 작가 인터뷰
이원곤 / 육근병 / 김해민 / 채미현과 닥터정 / 신진식 / 오경화 / 김형기 / 문주 / 김승영

IV 동시대 한국 미디어아트의 동향
1 동시대 한국미술의 전개
2 포스트매체/미디어의 상황과 한국 미디어아트
3 작가 인터뷰
이용백 / 석성석 / 문경원 / 김경미 / 태싯그룹 / 김윤철 / 양아치 / 유비호 / 최우람 / 김영섭 / 지하루 / 오창근 / 김태은 / 뮌 / 서효정 / 김현주 / 강은수 / 김병호 / 에브리웨어 / 김아영 / 신승백 · 김용훈 / 김태윤 / 박형준 / 백정기 / 신기헌 / 한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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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강미정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융합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 대구시 미술관 준비팀 수석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퍼스의 기호학과 미술사> 등을 쓰고 <신경미학>을 옮겼으며, '학제적 연구로서 신경미학의 틀짓기', '사이버네틱스와 공간예술의 진화', '디지털사진의 존재론' 외 다수의 논문을 출판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동시대 미술이론, 디지털미디어론, 신경미학에 관해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장현경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월간 <미술세계> 기자팀에서 근무했고, 《2019 광주미디어아트 페스티벌 White Magic City》, 2020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미디어파사드 창제작 전시 《야광(夜光)전당》, 《2020 서울라이트 DDP LIGHT ON》 등에서 해외 작가 전담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현재 전시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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