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층 vs. 매트릭스 Sci-Fis

얼마전에 <13층>(1999)을 다시 봤다. <메트릭스 2 - 리로디드>(2003)를 보고나서 비슷한 영화라 해서 본 기억이 있다. <매트릭스> 1편이 1999년에 개봉했으니, 비슷한 내용(즉, 가상현실)을 다루는 두 영화가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세상에 선보였던 셈이다.(미국에서 <매트릭스>는 5월 15일에, <13층>은 5월 28일에 각각 개봉했다!) 당시 나는 <매트릭스> 시리즈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13층>도 엄청 흥미로왔었다. <매트릭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쥬얼이 약한 면이 있지만, 반면 탄탄한 드라마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3층>도 못지 않았다. 막연히 "꽤 괜찮았었다"는 기억을 갖고 다시 봤던 이 영화는 역시 꽤 괜찮았고, 어쩌면 더 괜찮았다.

주인공 더글라스 홀은 자신의 상사, 퓰러를 죽이고도 기억이 없다. 정확히 말해 그가 상사를 살해한 기억이 없는데 왜 피묻은 셔츠가 자기의 욕실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퓰러가 자신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해주려고 했다는데 그건 과연 무엇일까? 의문을 뒤로 한채 홀은 자신과 동료들이 개발한 시뮬레이션 장치를 이용하여 그들이 '창조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아직 실험단계인 이 장치는 피실험자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홀은 퓰러가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메세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퓰러와 홀, 그리고 홀의 동료 휘트니가 함께 개발한 거대한 시뮬레이션 기계는 1937년도의 LA의 공간이었고, 그곳엔 세 사람의 외모를 모방하여 생성해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기계에 접속한 퓰러는 1937년도의 그리어슨에게 '빙의'되어 호텔의 젊은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1937년도의 존 퍼거슨에게 접속된 홀은 퓰러의 메세지를 찾아다니다가, 휘트니와 똑같이 닮은 애쉬톤을 만난다. 사실 퓰러는 애쉬톤에게 메세지를 부탁했는데 몰래 편지를 읽어본 애쉬톤은 그것을 홀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허탕을 치고 현실로 돌아온 홀은 듣도 보도 못한 퓰러의 딸, 제인을 만난다. 이상한 데쟈뷰를 느끼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한편, 홀은 전에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피우면서 퍼거슨의 영향을 느낀다. 다시 시스템에 접속하여 애쉬톤을 또 만나게 된 홀은 그가 편지를 읽고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 가상의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편지는 퓰러가 홀에게 전하려던 것이므로, 애쉬톤의 세계뿐 아니라 홀이 살고 있는 세계 역시 하나의 시뮬레이션임을 알려주려던 것이다. 애쉬톤과 격투를 벌이던 중 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홀은 애쉬톤이 그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끝'을 확인해 보고 만다. 자신이 사랑한 제인도 사실은 현실의 나타샤에게 '빙의된' 상위 세계의 사람이란 것도, 자신의 몸을 이용해 퓰러를 살해한 것도 상위 세계에서 '다운로드된 유저' 즉, 데이빗이란 것도 모두 알아버린 더글라스 홀. 그는 제인에게 묻는다. "이런 세계가 얼마나 되는 거요?" "수천개? 그런데 시뮬레이션 안에 또 하나의 시뮬레이션을 갖고 있는 건 당신 세계뿐이죠."

영화의 결말은 참 깔끔한 배경의 해피엔딩이다. 데이빗의 불의의 죽음으로 상위 세계에 접속되어버린 홀은 사랑하는 제인과 함께 평화로운 바닷가의 집에 살고 있다. 퓰러와 똑같이 생긴 장인어른에게 손을 흔들면서... 시뮬레이션들의 위계(hierachy)를 상정하고 있는 <13층>은 보드리야르나 데리다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이론과 잘 맞아 떨어지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위계라는 말이 어쩌면 어패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만든/생성한/창조한 쪽이 만들어진/생성된/피조된 쪽보다 우월하다 봐야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미래에서 온 창조자가 기술적으로 뒤떨어진 피조물의 인생을 조작한다는 스토리 구조가 형성된다. 제인은 자신이 온 2024년의 세계가 '진짜'이고, 거기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긴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시뮬레이션 속에 또 다시 시뮬레이션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제인의 세계라고 해서 '진짜'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 이 위계구조는 끝없는 시뮬레이션들 혹은 기표들(signifiers)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상 최초의 창조자를 찾아낼 도리가 없는 구조 안에서 현실은 곧 가상일 수밖에 없다.

상당히 복잡한 얘기들이 얽혀있는 <매트릭스>는 확실히 심오하다. 그래서 많은 논객들은 <매트릭스>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았다. 불교와 선사상을 닮았다는 둥, 장자의 호접몽 얘기라는 둥, 기독교의 메시아사상 코드가 보인다는 둥... 그런데 "가상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13층>이 한수위다. 매트릭스와 리얼리티가 엄연히 구분된다고 보는 <매트릭스>에선 여전히 현실감각이 남아있다. 그런데 <13층>처럼 도저히 '매트릭스'를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구조에선 진정하게 가상이 현실일 수밖에 없다.

매트릭스를 찍을 때 워쇼스키 형제가 키아누 리브스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으라고 했단다. 우리가 이런 거 찍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매트릭스>보다는 <13층>과 더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