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민정의 <Hidden Layers>전(2019.07.20-09.22) 서문입니다.
Hidden layers, 감정의 층들에 숨겨진 타자를 찾아서
강미정 (미학)
금민정은 꽤 오랫동안 건축적 공간과 영상을 중첩시켜 특유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주어진 공간을 촬영하여 자신의 느낌이나 다른 이들의 움직임에서 포착한 수치를 바탕으로 영상을 변형시킨 후 다시 그 공간에 조작된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을 한동안 꾸준히 사용했다. 숨쉬는 벽, 숨쉬는 집에서부터 옛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역사적 공간까지 공간의 성격이 달라짐에 따라 작품도 확연히 다르게 나타났지만, 누군가의 과거였을 공간에 현재의 순간들을 덧입힌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같은 맥락에서 조망해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공간과의 사투였던 것 같다. 그래 왔던 작가가 이번에는 주어진 공간이나 특정 장소에 연루된 테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연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금민정이 자연을 실내공간으로 끌어들인 것이 처음은 아니다. 문화비축기지를 감싼 외부 풍경을 내부 공간에 투사했던 적도 있고 화전민 부락에서 나무를 벽 삼아 프로젝션 매핑을 한 적도 있다. 그때는 자연 풍광 자체보다는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들이 작업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이야기들은 집단기억의 형태로 전승되어왔고, 원래 이야기를 구성한 사건들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장소에 현재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억과 이야기를 불러일으킨다. 언뜻 과거 전시들과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성도 서사성도 전처럼 두드러지는 것 같지 않다. 금민정은 “휴식을 위해, 감정을 다독이기 위해” 멀리 제주로 여행을 떠났었노라고 말한다. 그의 얼굴이 평온해 보인 것은 모르긴 해도 제주의 광활한 자연이 그에게 쉼을 주고 숯덩어리처럼 검게 타들어 가던 마음에 안정을 선사했기 때문이리라.
딥러닝 기술에서 말하는 ‘hidden layers’는 입력층과 출력층 사이에 있는 숨겨져 있는 여려 겹의 인공신경망을 일컫는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의 연산 경로는 마치 온갖 느낌, 기분, 감정, 생각이 얽히고설킨 인간의 마음처럼 꼭꼭 숨겨져 있다. 인공신경망이 인간 뇌신경세포들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모방한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테다. 고도로 지능적인 AI가 어떤 경로를 거쳐 특정한 출력값을 산출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주어진 자극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어떤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특히 그 반응이 기쁨, 슬픔, 분노, 질투, 사랑, 증오 같은 정서적인 것일 경우 다른 이의 감정은 물론 내 자신의 것조차 잘 납득되지 않을 때가 많다. 금민정은 말한다. 공간에 움직이는 영상을 입히기 시작하던 초기부터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초점을 맞춰왔노라고, 그동안 남들의 이야기와 움직임을 작품에 담기도 했지만 늘 자신의 감수성이 투사됐던 것 같다고. 서울역사, 서대문형무소, 문화비축기지... 어떤 장소와 이야기를 소재로 하든지 간에 작업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그곳에서 그가 경험했던 어떤 정서적인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금민정은 자신의 작업의 정당성과 객관성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기 시작했고, 하나의 방안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한 관람자들의 감정데이터를 수집하여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기분과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일뿐더러,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희미해지고 마는 한갓된 순간의 경험처럼 느껴진다. 일시적이고 덧없는 속성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들은 감정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고 따라서 숙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감정과 느낌의 본질, 그리고 마음과 몸의 관계를 사유했던 스피노자는 이러한 합리주의적인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겠다. 그는 감정, 느낌, 충동, 동기, 욕구를 통틀어서 정동(affect)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인간성의 중심부에 위치시킨다. 스피노자에게 정동은 한 개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몸체가 다른 몸체를 만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다. 나의 존재함은 그런 힘과 동일시되는 감성(sentiment) 또는 정동으로 확인될 수 있다. 정동의 작용은 양방향적이어서 나의 몸이 다른 몸에 영향을 줄 수도, 반대로 다른 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흔히 말하듯이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우리의 행동이 대부분 고귀한 신념보다는 감정적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정동의 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정동의 철학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종(species)을 형성해 온 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느낌, 감정, 충동, 욕구, 즉 정동이다.

“내가 느낀 것이 맞는 것인지, 내가 해온 것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회의하던 금민정은 이번 전시에서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갤러리 윈도우에는 숯을 깨어 만든 <소극적 분노_주상절리>가 늘어선 가운데 통나무가 액자처럼 풍경을 품은 <적극적 극복_수월봉>이 어우러져 있다. 갤러리를 들어서자마자 관람자는 숯 쪼가리, 나무, LED패널을 결합시킨 역동적인 설치작품 <타인의 고통_산록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감정이, 변형된 영상을 담은 두 점의 대작에 녹아들어 있다. 후회, 욕정, 환희, 희망, 자기 연민 등의 제목이 붙은 비디오소품들을 지나 전시장 안쪽 공간으로 들어서면 바닥과 전면 벽에 제주에서 촬영한 장면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관람자들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옮겨 놓은 주상절리, 함덕해변, 협재와 비양도, 한라산 숲속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들은 출렁이는 파도와 나무가 빽빽한 숲이 전개되고 있는 공간에서 태블릿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보고할 수 있다. 관람자들이 색상, 이미지 내용, 빠르기 정도를 묻는 질문에 답하면서 마주하는 자연 풍광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가져온 대담, 적극, 경솔, 후회, 수치, 사랑, 연민, 환희, 욕정, 경탄, 미움, 절망, 두려움 같은 감정값을 적용하여 변형시킨 영상이다. 이상하게 울렁이고 움직이는 풍경들은 보는 사람들마다 완전히 다르게 느낄 수도 있고 대체로 비슷하게 느낄 수도 있다. 관람자들이 제출한 답변들은 감정 데이터로 수집되어 이후 전시에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재료가 될 예정이다.
자연에서 가져온 나무와 비디오영상의 결합으로 탄생한 비디오조각들, 그리고 공간 자체가 조형적으로 영상화된 전시장만으로도 내용이 차고 넘칠 듯한데, 금민정이 제주의 풍경에 대한 감정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려는 것은 그간의 작업과정에서 파생한 의구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정동이 하나의 몸체로서 우리 각각의 존재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면 적어도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타자와의 연결망 속에서 발생한다. 한 순간의 우리 존재는 타자의 한 양태와 마주침으로써, 오로지 그 마주침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짐작컨대 금민정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타자를 향하지 않고서는 존재의 의미를 찾을 방도가 없는 한 인간으로서 새로운 의미생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감정 데이터 처리를 방법으로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어떤 식으로 도출되든지 간에 그것은 작가가 타자로, 타자가 작가로 향하는 변형과정의 단편들이 될 것이다. 금민정은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의 작업은 지나간 나와 타인의 기억을 자꾸 지지하고 잡아내어 새로 만들어내는 기억의 공간이다, 그것이 나의 비디오이다.” 지난 몇 년간 역사적 기억의 공간들에 변형된 영상을 덧입혔던 작업들도 타자와의 만남과 이를 통한 새로운 의미생성의 추구였다. 특정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감정에 주목했던 예술가에게 기억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기억이 언제나 감정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초기의 숨쉬는 벽에서부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감정데이터 수집까지의 흐름을 되짚어 볼 때 금민정의 공간조형 영상작업은 섬세한 감성의 차원에서 추상적 추론의 단계로 이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르게 말해 그의 관심이 경험의 질적 국면에서 양적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하다. 애초에 금민정의 작업에서 단초가 되었던 “내가 느끼는 것, 나의 감정”을 여러 모드로 변용시키면서 거쳐 가는 일시적 단계일지언정 현재로서는 그렇게 보여진다. 금민정은 상당히 이지적인 작가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유달리 길고 자세하게 쓴 그의 노트들에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가 꽤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번 전시가 작가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그는 지금 자신의 지적인 면모를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자들에게는 작품 하나하나가 감성적으로 충일한 경험으로 다가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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